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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 이석의 일본서브컬처를 보는 눈

남장 여자의 모델은 남자가 아니다

데즈카 오사무(1928-1989)의 작품, 리본의 기사(1953-56)는 남장 여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소녀만화 장르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 후, 남장 여자 캐릭터는 소녀만화에 빠져서는 안 될 요소로 자리 잡으며 소녀만화가 인기를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데즈카 오사무라는 걸출한 천재만의 힘으로 남장 여자 캐릭터가 탄생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리본의 기사의 남장 여자 캐릭터에게는 실재하는 모델이 있었다. 그러한 모델이 없었다면 아무리 데즈카 오사무라 하더라도 리본의 기사와 같은 작품을 창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데즈카 오사무와 다카라즈카 가극단

 

 그 모델은 바로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배우들이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1914년에 창립한 뮤지컬 극단으로 배우 전원이 여성이기에 남자 배역까지 여자가 담당하고 있다. 일본 오사카의 철도 회사인 한큐 전철이 오사카 외곽에 위치한 다카라즈카의 온천에 관광객을 모으기 위해 가극단을 결성한 것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각주:1]. 남장을 한 여자 배우들이 출현하여 화제를 모은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점차 인기를 끌어 1930년대에는 다카라즈카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왼편은 다카라즈카의 배우들에게 안긴 어린 데즈카의 사진이며 오른 편은 그 시절을 회상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린 만화이다.
이 만화에 따르면 아기 데즈카는 가극단의 공연과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혼동해서 빨리 막을 올리자고 장례식장에서 칭얼대었다고 한다. )

 

그 지역 문화의 수혜를 받으며 성장한 예술가가 바로 데즈카 오사무였다. 데즈카는 1933, 5살 때부터 다카라즈카에 살며 가극단과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데즈카의 어머니는 아들을 가극단의 극장에 자주 데리고 갔으며 이웃집에 사는 가극단의 배우들은 데즈카를 무척 귀여워했다고 한다. 청년이 되어 만화가 데뷔를 준비하면서도 데즈카는 가극단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46년도의 데즈카의 일기를 보면 의대 공부와 만화 창작에 바쁜 와중에도 틈만 나면 그가 가극단의 공연을 보러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데즈카가 자신의 소녀만화의 주인공으로 가극단의 배우를 닮은 캐릭터를 그린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데즈카는 가극단에서 남장을 했던 특정 배우를 모델로 리본의 기사의 사파이어 왕자라는 캐릭터를 조형했으며 애니메이션 리본의 기사의 주인공 역으로 가극단 출신의 성우를 기용했다고 한다. 이렇듯 다카라즈카 가극단에서 보여주는 남장 배우들의 몸짓과 자태, 목소리는 리본의 기사의 모범이 되었다.

 

리본의 기사와 가극단에 나타나는 남성성/ 남자다움의 기원

 

  그렇다면 이러한 리본의 기사의 남자다움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남자 옷을 입은 리본의 기사의 사파이어 왕자는 왕위계승자에 어울릴 만큼 용감하고 남자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사파이어 왕자의 남자다움은 실재하는 남자가 아니라 남자를 흉내 내는 여자 (다카라즈카의 남장 여배우)를 다시 흉내 내서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 리본의 기사에 보이는 남성성은 오리지널(실재 남자=생물학적 의미의 남자)에서 자연스레 파생한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의 복사물을 한 번 더 복사해서 만든 "복사물의 복사물"이다.

 

  

 

그러면 데즈카가 모방한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남장 배우들의 모델은 "진짜" 남자인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남장 배우들은 현실 속 남자가 아니라 가극단 선배 배우의 남자 연기를 보고 학습한다고 전해진다. , 데즈카 오사무가 가극단의 남장 배우를 모방했듯이 가극단의 남장 배우도 선배 배우의 포즈를 따라하며 무대 위에서 남자다움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극단에서 표현하는 남성성도 리본의 기사처럼 "진짜" 남자를 재현한 게 아니라 "진짜" 남자를 재현한 걸 다시 재현한 모조품, 바꿔 말하면 가짜의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극단의 관객들은 남장 배우의 연기를 보며 진정한 남자다움을 느끼며 동경하는 것이다. 소녀만화 리본의 기사의 독자가 그러하듯 가극단 관객의 대다수는 여자이다. 그들은 가극단의 남장 배우들을 가리켜 "남자보다 더 남자답다(よりも男前)"고 칭송하고 연모한다. 적어도 그들에게 가극단 남장 배우들은 현실의 어느 남자보다도 더 리얼한 존재인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실재 남자보다 남장 여자, 그것도 다른 남장 여자를 따라한 남장 여자 가 더 남자답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아즈마 소노코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저명한 페미니스트,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을 적용한다.[각주:2] 아즈마 소노코가 인용한 문귀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1990)에서 말한 "젠더가 스스로를 형성할 때 본받는 원본의 정체성이란 결국 기원 없는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젠더 패러디는 보여주고 있다."[각주:3]라는 글이다. 아즈마 소노코에 따르면 가극단 남장 배우들이야말로 훌륭한 젠더 패러디의 예라는 것이다

  

  

 

아즈마 소노코의 의견에 나도 공감한다. 보통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는 생물적 성()인 섹스(sex)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남자다움/ 여자다움><실재 남자/ 여자>가 가진 특성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남자다움/ 여자다움>의 모델은 <실재 남자/ 여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연출했던 <남자다움/ 여자다움>인 것이다. 어떠한 <남자다움/ 여자다움><실재 남자/ 여자>의 특성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복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게 버틀러의 생각이다. 따라서 버틀러는 젠더와 섹스 사이의 관계를 부정하고 젠더는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이라 단언한다.[각주:4] 그리고 이와 같은 버틀러의 생각은 "젠더 패러디"인 가극단의 남장 배우로 입증되는 것이다. 남장 배우들은 실재 남자가 아니라 다른 남장 배우의 연기를 보고 "남자다움"을 연출하고 이를 본 여자 관객들은 남장한 여자 배우가 "남자보다도 남자답다"고 열광한다. 여기서 "남자다움""기원 없는 모조품"이 되어 생물학적으로 여자인 가극단 배우에 의해 가장 멋지게 발현된다.

 

가극단과 소녀만화의 관계

 

젠더가 "기원 없는 모조품"이며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이란 버틀러의 생각은 가극단과 소녀만화의 관계를 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리본의 기사가 발표된 이후에도 수십년에 걸쳐 다카라즈카 가극단과 소녀만화는 끊임없이 상호교류하고 있다. 가극단의 상상력에 자극되어 소녀만화 리본의 기사가 탄생했다면, 반대로 소녀만화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가극단 문화가 탄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밀려 1970년대부터 가극단의 인기는 현격히 떨어졌는데 그런 존폐의 위기에서 가극단을 구한 것은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한 베르사이유의 장미였다. 가극단이 1974년에 공연한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전대미문의 인기를 끌며 가극단 최고의 히트작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주인공인 오스칼의 남자다운 매력에 반한 여성 관객이 많아 가극단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오스칼을 손꼽는 이가 많다.

 

 

 

그러나 이처럼 남자다운 오스칼의 모델이 된 건 실제 남자가 아니라 픽션으로 만들어진 만화 캐릭터이다. 원작 베르사이유의 장미(1972-73)의 주인공 오스칼은 여자 아이로 태어났으나 귀족 집안을 계승하기 위해 남자가 받는 교육을 받고 늠름한 군인으로 성장한다. 생물학적으로 그녀는 여자였지만 주위의 많은 여인들이 왕자님처럼 떠받들 정도로 남자다운 매력에 가득하다고 작품에서 그려진다. 사실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소녀 만화에 등장하는 남장 여자 주인공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소녀만화인 리본의 기사의 사파이어 왕자와 그 모델인 가극단의 남장배우에 다다르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만화 캐릭터 오스칼은 <모조품(선배 배우의 남자 연기를 학습한 가극단의 남장배우)의 모조품(남장배우를 모델로 삼은 사파이어 왕자)의 모조품>인 것이다. 그런데 이 <모조품의 모조품의 모조품>을 다시 모방한 가극단의 "베르사이유의 왕자"는 성황리에 공연되고 그 주인공, 다시 말해 <모조품의 모조품의 모조품>의 모조품이 보여주는 남자다움에 관객은 환호성을 올렸다. 여기에서는 <실재 남자=생물학적 의미의 남자>의 어떠한 흔적이나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또한 이렇게 소녀만화나 가극단에서 표현하는 모든 남자다움이 자유롭게 만들어진 인공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남자다움이란 "기원 없는 모조품"이며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인 것이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에 따르면 <남자다움/ 여자다움><자연/ 생물학적인 섹스>과 상관없이 상호간의 패러디와 반복에 의해 표현되고 나타난다. 1970년대 베르사이유의 장미로 흥행에 대성공한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이후에도 소녀만화를 끊임없이 각색하여 무대에 올리게 된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소년의 모습으로 영원을 사는 흡혈귀가 등장하는 소녀만화 포의 일족을 재해석해,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공연하며 수많은 여자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렇듯 여자들이 감탄하는 진정한 남자다움은 생물학적인 남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에서 끊임없는 자기 복제의 길을 걸으며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이석, 일본문화연구소 연구원)

 

 

  1. 대부분의 철도를 국가가 관리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민간 기업이 건설, 운영하는 전철(이를 사철이라 한다)이 발달되어 있다. 일본의 전철 회사는 자신의 철도를 이용하는 이용객의 수를 늘리기 위해 전철역 근처에 백화점, 야구장, 극장을 짓고 야구단, 극단 등을 창설해 고객들을 유치한다. 이런 방식으로 일본의 전철 회사는 전철과 백화점/ 야구단/ 극단이 함께 흥행하는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사업을 확장해왔다. 일본의 16개 전철 회사 중 하나인 한큐 철도만 해도 다카라즈카 극단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대표적 영화 배급사인 도호를 세우고 한큐 백화점과 야구단 오릭스 버팔로즈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본 대중문화을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철도 회사의 역할을 언급할 수 밖에 없다. [본문으로]
  2. 東園子「女同士が見せる夢-ファンは「宝塚」をどう見ているか」『それぞれのファン研究 : I am a fan』, 風塵社, 2007, p.212 [본문으로]
  3. "gender parody reveals that the original identity after which gender fashions itself is an imitation without an origin." (Judith Butler, Gender Trouble :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New York : Routledge, p.138.) [본문으로]
  4. 버틀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구성된 젠더의 위상이 섹스와 완전히 별개라고 이론화되면 젠더 자체는 자유롭게 떠도는 인공물이 된다. 그 결과 남자와 남성적인 것은 남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여자의 몸을 의미할 수 있고, 여자와 여성적인 것은 여자의 몸을 의미하는 만큼이나 쉽게 남자의 몸을 의미할 수도 있다."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문학동네, 2008, pp.95-96.) [본문으로]